투표참여를 독려하는 슬로건으로 자주 등장하는 말이다. 사실 수십만 이상이 한명을 뽑는 선거에서 한표는 의미를 상실하기 쉽다. 하지만 역사에서 보면 뜻밖에도 한표의 위력을 실감하는 경우가 적지 않게 있었다.
1839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지사 선거에서 마커스 몰튼의 도전을 받았던 현역 주지사 에드워드 에버렛은 투표 당일까지 선거운동을 하느라 미처 자신은 투표하지 못했다. 뒤늦게 깨달은 주지사는 투표장으로 달려갔으나 5분이 늦었고 투표는 불허되었다. 결과는 5만1034표 대 5만1033표로 몰튼의 승리. 에버렛은 자신의 1표를 행사하지 못해 주지사 선거에 낙선하는 불운을 겪었던 것이다.
한국에서도 이런 사례는 많다. 2002년 6·13 지방선거 때 경기 동두천시 상패동 기초의원 선거에 출마한 이수하, 문옥희 후보는 똑같은 1천162표를 얻었다. 둘 중 누가 1표만 더 얻었다면 논란의 여지가 없었겠지만, 이들은 결국 '득표수가 같을 경우 연장자순'이라는 선거법 규정에 따라 문 후보가 당선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또 강원 원주시 개운동 기초의원에 출마한 이강부 후보는 총 1천542표를 얻어 하정균 후보를 1표차로 따돌리고 당선됐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는 4곳이 20표차 이내에서 당락이 결정됐으며, 특히 경기 광주에 출마했던 당시 민주당 문학진 후보는 당선자인 한나라당 박혁규 후보에게 3표 뒤진 1만6천665표를 얻어 분루를 삼켰다. 문 후보는 한동안 '문세표'라는 별명을 달고 다녀야 했다.
투표자가 적은 국회에서는 이런 일이 더 많기 마련이다. 1870년 보불전쟁 패배로 제2 제정이 무너진 상황에서 프랑스 의회는 1875년 왕정을 대통령제 공화정으로 바꾸는 역사적인 투표를 하게된다. 이 안건은 353 대 352의 1표차로 통과돼, 프랑스는 공화정으로 가게 됐다.
이보다 조금 전인 1868년 미국의 앤드루 존슨 대통령은 1표 때문에 탄핵을 면했다. 남북전쟁 이후 남부지역 재건과정에서 온건, 관용의 호의적 정책을 표방, 북부의 공화당 급진파와 대립했던 그는 미 의회의 탄핵소추에 직면했다. 그해 5월 16일 미 상원에서 표결에 부쳐진 존슨 대통령 탄핵안은 35 대 19로 부결됐다. 탄핵에 필요한 재적의원 3분의2에 단 1표가 모자랐던 것. 찬성표가 1표만 더 나왔더라면 그는 미 역사상 최초이자 현재까지는 유일한 탄핵 대통령으로 남을 뻔했다.
한국 정치사에서도 '1표의 위력'이 발휘된 대표적인 사례는 1954년의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이다. 1표차는 아니지만 1649년 영국왕 찰스1세는 단 6표차로 사형에 처해졌다. 바로 전 해 영국 하원 표결에서 26 대 20으로 그의 처형을 결정했던 것이다.
선거가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거대한 대중 속에서 존재가치를 잊고 살고 있다. 따라서 선거에 대해서도 나 하나쯤이야 하는 생각으로 스스로의 의미를 부정하기 쉽다. 하지만 권리라는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사실 우리의 한표는 귀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나 하나의 한표가 선거를 좌우한다는 생각으로 투표에 참여해보자.
정창수 역사기고가
정창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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